전주어진박물관

역사실

역사실

경기전 건립, 태조어진 봉안, 태조어진의 수난과 보존, 태조어진의 관리, 경기전 제례,
전주의 조선왕조 관련 유적지, 조선왕조실록 등 경기전, 태조어진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歷史室
태조어진
태조어진의 전주 봉안

조선왕조는 건국 후 태조어진을 한양을 비롯해 고구려의 수도 평양, 신라의 수도 경주, 고려의 수도이자 태조가 살았던 개성, 태조의 출생지 영흥, 태조의 본향 전주 등 모두 6곳에 봉안하였습니다.

전주에 태조어진을 봉안한 것은 조선 초인 1410년(태종 10)으로, 경주 집경전의 태조어진을 모사하여 모셨습니다. 조선왕조는 건국자인 태조의 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여 이곳이 왕실의 고향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현재의 태조어진은 1872년(고종 9)에 새로 모사한 것입니다. 조선 초의 태조어진은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그림을 물에 씻어내고 백자항아리에 담아서 경기전 북계상(北階上)에 묻었습니다.

태조어진 보관
태조어진의 수난과 보존

조선시대에 태조어진이 많게는 26점까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주 경기전에 봉안한 태조어진이 유일합니다. 전란과 화마의 위기 속에서도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지역민들이 사력을 다해 수호한 결과입니다.

임진왜란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전 태조어진을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정읍 내장산으로 이안하여 1년간 수호하였습니다. 이후 어진을 아산객사로 이안했다가 강화도를 거쳐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 봉안하여 화를 면하였습니다.

정해년 대화재 - 1767년(영조 43) 정해년에는 전주에 큰 불이 일어나 민가 1천여호를 불태우고 불길이 경기전에 미치자 태조어진을 향교 명륜당으로 이안하여 화마를 피하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 -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는 전주성이 전란에 휩싸이자 태조어진을 위봉산성으로 이안하여 화를 면하였습니다. 위봉산성은 유사시 태조어진을 수호하기 위해 숙종 때 수축한 성입니다.

慶基殿儀寫本
경기전 건립과 중건

태조어진을 봉안한 전주의 진전을 경기전이라고 칭한 것은 1442년(세종 24)입니다.

경기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주성이 일본군에 점령되면서 소실되어, 1614년(광해군 6)에 중건되었습니다. 1676년(숙종 2)에는 진전 동편 전주사고 자리에 별전이 건립되었습니다.

1919년 일제에 의해 경기전 서편 부속건물이 철거되고 일본인 소학교가 건립되었으며, 1937년 별전이 철거되었습니다. 1997년에는 경기전 서편 부속건물 자리에 있던 중앙초등학교가 이전되고, 2004년 부속건물이 복원되었습니다.

건물 형식은 다포계 건물로, 소박함을 추구하는 유교건축에서 사용된 예가 흔치 않습니다.

경기전 기와조각
경기전 건축구조와 각 건물 기능
  • 수복청 : 수복 등이 거처하는 곳
  • 수문장청(경덕헌) : 수문장이 일을 보는 곳
  • 동재 : 참봉 수직소(守直所)
  • 서재 : 참봉 수직소
  • 마청 : 관리들의 말을 두는 곳
  • 어청 : 제사 시 음식을 만들 때 쓰는 우물
  • 전사청 : 제사에 사용하는 물건이나 제수음식을 만드는 곳
  • 조과청 : 유밀과 과자 등 제사음식을 만들고 보관하는 곳
  • 용실: 제사용 음식을 만드는 방앗간
  • 정전 : 어진을 봉안하고 제례를 지내는 공간
  • 정자각 : 제례 시 준소(樽所)가 설치되고 집례자가 서 있는 곳, 우천 시 행례 대비
  • 동·서익랑 : 동익랑은 행례 시 소차(小次)가 설치되며, 서익랑은 제물을 보관해 두는 곳
  • 동·서월랑 : 비가 올 때도 제례를 행할 수 있도록 마당을 대신하여 마련한 배위의 공간
  • 내신문 : 정전의 안쪽 출입문
  • 외신문 : 정전의 바깥 출입문
  • 별전 : 임시 어진 봉안소
  • 군막 : 금화군 등이 수직하던 곳
  • 시위청 : 시위군이 머무는 곳
경기전관리 문서
경기전 관리

경기전 관리조직은 관리 전반을 책임지는 령(令, 종5품) 1인과 참봉(參奉, 종9품) 1인을 비롯하여 청소관리를 담당하는 수복(守僕) 210명, 소방업무를 맡은 금화(禁火) 100명, 수호를 위한 충의군(忠義軍) 360명 등으로 편제되었습니다.

근무형태는 령과 참봉이 교대로 수직하였습니다. 수복과 금화군은 각각 4명이 도수복·도금화로 선발되어 1명이 5일씩 수직하였습니다. 또 수복과 금화군 중에서 각각 2명이 청지기(廳直)로 선발되어 돌아가며 수직하였습니다. 이 외의 수복과 금화군은 순번에 따라 수직하였습니다. 시위군과 별도로 수문장을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수복은 양인, 금화군은 양인과 천민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충의군은 왕실의 후예나 공신의 후예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수문장은 무관으로 도내에 거주하는 선전관과 부장 출신들입니다. 봉심(奉審), 즉 어진을 살피는 일은 5일 간격으로 전관(령, 참봉)이 관복을 갖추고 행하였습니다.

경기전 제례
경기전 제례 대향(大享, 6대 제향)

경기전의 대제는 1년에 여섯 번, 설날·한식·단오·추석·동지·납일(臘日)에 거행되었습니다. 삼헌(三獻, 술을 세 번 부어 올림) 및 음복례(飮福禮)까지 모든 제례 절차를 행하였습니다. 1908년 두 번으로 줄여 청명과 추석에 지냈고, 광복 이후에는 한 번으로 줄여 동지에 지냈습니다. 1978년부터는 음력 9월9일 중양일로 바꾸어 대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작헌례(酌獻禮)

작헌례는 어진의 이안 또는 환안 때 지내는 일종의 고유제(告由祭)로서 대제와 달리 일헌(一獻)에 음복례가 없습니다.

분향례(焚香禮)

분향례는 매달 삭망(朔望, 초하루와 보름)에 지냅니다. 제사 음식을 차려놓지 않고 간단하게 분향 및 봉심을 겸하는 의식입니다.

진홍색 향주머니 3개(의장물)
태조어진 봉안과 의장물

태조어진은 일월오봉도 앞에 봉안하며 항상 펼쳐두고 감지 않았습니다. 어진 아래에는 좁고 긴 용상과 석제 용두를 배치하였습니다.

어진을 모신 감실(침실) 안에는 또 진홍색의 얇은 비단으로 만든 작은 향주머니 4개, 진홍색 비단으로 만든 큰 향주머니 2개를 걸었으며, 좌우에는 흰색 명주 수건을 각각 1개씩 두었습니다. 정전 내 좌우편에는 용선과 봉선, 홍개와 청개, 일산과 양산을 두며 운검 1쌍을 정전 안 정문에 세워두었습니다.

조경단비
조경묘와 조경단

조경묘(肇慶廟)는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과 시조비 경주김씨의 위패를 봉안한 왕실의 시조 사당으로 1771년(영조 47) 경기전 뒤에 건립하였습니다. 이때까지 조선왕실의 시조를 모시는 사당이 없었습니다.

조경단(肇慶檀)은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의 묘소로 건지산에 있습니다. 1899(광무 3) 이한의 묘자리라고 전해지는 곳에 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하였으며, 고종이 친히 「대한조경단(大韓肇慶檀)」이라고 쓴 비를 세웠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과 전주사고 :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사고본 실록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대부터 철종대까지 총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그 분량이 888책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서입니다. 실록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가 드물어 199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전주사고(全州史庫)는 1439년(세종21)에 설치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실록을 승의사, 진남루 등에 보관하다가 1473년(성종4) 경기전 동편에 실록각을 건립하고 여기에 실록을 비롯한 국가 중요 서적을 보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 태인 선비 손홍록과 안의를 비롯한 지역민들이 태조어진과 함께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수호하였습니다. 내장산에서 1년간 지켜진 실록은 이후 아산, 해주, 강화도 등을 거쳐 1597년 평안도 안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져, 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관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주사고본 실록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조선전기 4대 사고 중에서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의 실록은 전란 중에 소실되었으나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지역민들이 사력을 다해 수호한 결과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전주는 역사지킴이의 고장입니다.

왜란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실록을 다시 출판하여 조선후기 5대사고(춘추관, 정족산사고, 오대산사고, 태백산사고, 적상산사고)에 봉안하였습니다.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후 강화도 정족산 사고에 보관되었다가 현재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편액:풍패관
풍남문과 풍패관

조선시대에 전주를 ‘풍패지향’이라고 하였습니다. 풍패란 건국자의 고향을 일컫는 말로, 한나라를 건립한 유방의 고향이 풍패인데서 유래하였습니다.

풍남문(豊南門, 보물 제308호)은 전주부성의 남문으로 1767년(영조 43)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 축조하였습니다. 이 때 ‘풍패’의 ‘풍’자를 따서 남문을 풍남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서문은 ‘풍패’의 ‘패’자를 따서 패서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주객사(보물 제583호)는 풍패관이라고 하였습니다. 객사 중앙에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썼다고 전해집니다. 글자 한 자의 세로 길이가 1.79m, 네 자를 합친 가로 길이가 4.6m에 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