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실

가마실은 1771년 조경묘의 위패를 봉안할 당시 사용하였던 가마와
1872년에 태조어진이 모사되어 경기전에 봉안될 당시 사용하였던 가마들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향정은 향로와 향합을 싣고 가는 조그마한 가마로, 향정자라고도 합니다. 위 향정은 1872년 태조어진을 이안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4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지붕아래에는 공포를 장식하였습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구성한 후 녹색으로 칠하였으며 추녀 하부에는 금칠을 한 풍경을 달았습니다.

신연은 어진의 이안이나 봉안에 사용하였던 가마를 말하며 위 신연은 어진을 이안할 때 사용하였던 가마입니다. 대개 가마꾼 10명 이상이 맵니다. 지붕은 둥근 형태이며, 꼭대기에는 호리병 모양의 정자(頂子)를 장식하였습니다. 사면에 난간을 낮게 설치하고 그 판에 금색으로 용무늬를 그려 넣었습니다. 몸체 사방으로 주렴을 늘어뜨렸고, 그 위에는 전후 각 3개씩, 좌우에 각 6개씩 총 18개의 낙영을 장식하였습니다. 앞뒤면에 문을 달아 어진을 봉안한 흑장궤를 앞에서 싣고 내릴 수 있게 하였으며 가마채의 끝 부분 및 몸체와 접한한 부분에도 각각 용머리를 장식하였습니다.

신연은 어진의 이안이나 봉안에 사용하였던 가마를 말하며 위 신연은 조경묘에 모셔진 위패를 이안할 때 사용하였던 가마입니다. 둥근 지붕 형태의 가마로 꼭대기에는 호리병 모양의 정자를 장식하였으며 사면에 난간을 높게 설치하고 사방에 휘장을 둘렀습니다. 내부에는 흑장궤가 좌우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옻칠한 나무를 끼워 세웠고 그 아래에는 흑장궤가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윤여축을 설치하였습니다.

가교(駕轎)는 조선시대 고관의 행차 때 사용하던 가마로, 1872년 태조어진을 봉안할 때 어진 봉안 책임자인 배왕대신(陪往大臣)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형태는 연과 마찬가지로 2개의 가마채 위로 옥교를 얹었으며 내부에는 교의를 설치하고 몸체판에 금색으로 연화문을 그렸습니다. 익장(翼帳)에는 전후좌후에 30개의 낙영을 달았습니다. 가마채 끝 부분 및 몸체와 접한한 부분에 각각 용머리를 장식하였습니다.

채여(彩輿)는 왕실의식 때 귀중품을 옮겨 싣는데 쓰던 교자(轎子)와 비슷하게 만든 가마입니다. 이 채여는 조경묘의 위패를 봉안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향정자와 구조가 비슷한데, 다만 가마채에 운족(雲足)을 조각하였고 지붕은 집모양처럼 하되 아청색 면포(綿布)를 덮고 그 위에 주칠한 정자(頂子)를 설치하였습니다. 처마에는 기와를 상하로 장식하였고, 사면에는 장자(障子)를 설치하여 안팎으로 종이를 붙여서 모란을 그려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