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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대로

1부 전주의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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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대로
  • 기점 교동 1-1 (한벽당)
  • 종점 반월동 726-1(월드컵 경기장)
  • 길이 총 11,465m
  • 폭 50m
기린대로 이미지
유래 및 의의

기린대로는 전주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이다. 이 도로에 기린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전주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라는 점 때문이다. 동양에서 기린은 성인이 세상에 날 때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기린은 살아있는 풀을 밟지 않으며 생물(生物)을 먹지 않는 어진 짐승으로 용, 거북, 봉황과 더불어 사령(四靈)이라고도 한다. 사관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내릴 수는 있으나 조선 개국조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전주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심도로에 기린대로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전주가 조선 개국조 이성계의 본향이라는 점에서 그에 걸맞은 상징 의미를 담은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전주팔경의 으뜸인 기린토월(麒麟吐月)로부터 비롯된다. 조선시대 전주부성은 승암산에서 시작된 산자락이 기린봉, 종광대로 이어지며 만들어진 사위에 에둘러 감싸이고, 남고산에서부터 유연대로 이어지는 산자락이 만들어낸 품속에 고즈넉하게 안겨 있는 지형적 특징을 갖는다. 전주부성을 중심으로 그 동쪽 산의 능선이 기린의 등처럼 구비 져 있고 그곳에서 둥근 달이 떠오르는 풍광을 보며 이 지역의 호사가들은 기린이 여의주를 토해내는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인물의 출현과 관련한 상상의 동물 기린이 여의주를 토해내는 상상 역시 조선 비조의 본향에 대한 상징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기린대로 명칭 부여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측면을 통합하여, 기린봉에서 떠오르는 만월로부터 느껴지는 상서로운 기운 속에 조선 건국조의 본향으로서의 전주가 가진 역사성을 담아낸 데서 그 유래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기린대로 주변의 환경
발리산 주변

<한벽당>
기린대로의 기점 부근에 한벽당이 위치해 있다. 한벽당은 1404년(태종 4년) 조건 개국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최담 선생이 지은 누각으로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긴 곳이다. 이곳은 전주팔경 중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煙)과 연관된 곳으로서 한벽청연이란 슬치에서 발원한 상관천의 물길이 이곳 한벽당 아래의 바윗돌에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키는 모습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옥류동과 자만동>
기린대로의 기점에서 북동쪽으로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 옥류동과 자만동이다. 옥류동은 낙수정 혹은 군경묘지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동네로 옥류천이라는 샘으로부터 마을 이름이 유래된 동네이다. 자만동은 옥류동보다 좀더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 후기의 명필 창암 이삼만 선생의 태생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자만동과 옥류동은 모두 발리산(발대산, 발산) 자락에 안겨 있는데 발리산(發李山)이란 이름은 이곳이 조선 왕조의 발상지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자만동 기슭에 고종황제가 친필로 쓴 목조구거지지(穆祖舊居之地)라는 목조유허비가 있다.

<오목대>
발리산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어내리다가 그 기운을 모아 붓 끝으로 힘 주어 찍어놓은 점 같은 언덕배기에 오목대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에 양광, 전라, 경상의 3도 순찰사로서 남원 운봉에서 왜구 아지발도 무리를 무찌르고 돌아오다 머물러 개선 잔치를 베푼 곳이다. 이때 태조는 이씨 종친들을 모아놓고 주연이 한창일 때 한 고조의 대풍가를 호기있게 읊어 넌지시 고려를 거꾸러뜨릴 포부를 비치자 이때 정몽주가 이를 못마땅히 여겨 남고산에 있는 망경대 위에 올라 시를 읋으며 북천을 우러러 보며 개탄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향교>
전주향교는 태종 10년(1410년) 지금의 경기전 부근에 있었으나 선조 36년(1603년)에 관찰사 장만이 이곳으로 옮겼다. 전국 향교 중 유일하게 공자, 맹자, 증자, 안자의 아버지 위패를 봉안한 계성사(계성사)가 있고 장판각에는 주자대전, 성리대전, 사기평림 등의 목판이 소장되어 왔다.

전주시청 주변

한벽당에서 출발하여 기린대로를 따라 올라오면 왼편으로 전주시청을 볼 수 있다. 전주시청과 기린대로는 맞닿아 있으며 시청의 입구는 여느 공관과 달리 진입로가 없다. 그 까닭은 지금의 시청 건물은 전주역사가 있던 자리였으며 기린대로는 철로가 지나가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청 광장은 전 전주역 광장이다. 전주시청 주변의 기린대로는 전 전주역 시절의 역 주변 모습과 새로 전주시청이 들어서고 철길 대신 기린대로가 들어선 후에 변화한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기린대로를 따라 양 옆으로 새로 세워진 건물들은 시청과 함께 변화한 모습이며 그 건물들 뒤편의 모습은 과거 전주역 시절의 모습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금암광장에서 호남제일문까지

금암광장 앞에서 기린대로는 과거 철길 자리에 개설된 도로와 본래 도로가 만난다. 태평양수영장 뒤로 철길이 있었으며 태평양 수영장 앞으로 이어지는 기린대로는 전주에서 군산까지 이어지는 도로로서 평양지대의 곡물을 수탈하기 위해 개설된 도로로 알려져 있다. 이 도로를 따라 종합경기장, 덕진공원 앞, 추천대교, 팔복동을 지나 월드컵경기장까지 곧게 뻗어있다. 기린대로는 명실공히 전주의 도심 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전주 제1의 중심 도로이며 전주의 관문이기도 해서 기린대로로 들어서면 호남제일문이 세워져 있다.

백제대로

기점과 종점
  • 기점 : 평화1가 611-6 (꽃밭정사거리)
  • 종점 : 우아3가 746-59 (전주역 앞)
  • 길이 : 8,425 m
유래 및 의의

백제대로는 전주의 서남쪽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로로 꽃밭정이 삼거리에서 전주역까지 이어지는 도로다. 역사적 사실을 도로명칭으로 부여한 도로로 전주의 서남쪽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진 전주를 상징하는 도로이다. 백제라는 이름은 온조가 열었던 백제의 땅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백제의 땅이었던 전주가 신라에 합병이 되었고, 그 뒤 2백 4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서기 900백년 견훤이 전주에 백제의 맥을 잇겠다고 ‘백제’라는 나라를 다시 세우며 나라를 세우는 대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삼국의 시작을 상고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난 후에 혁거세赫居世가 흥기한 고로 진한과 변한이 이것을 따라서 일어났다. 이때에 백제는 나라를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668 ~ 669)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따라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이 권토卷土하여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처럼 비겁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나는 지금 감히 도읍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백제의 사무친 숙분宿憤을 풀려온 것뿐이다.”[삼국사기 제 50권 열전 제 10 견훤]

견훤은 나라 이름을 당당하게 백제의 맥을 잇는다는 뜻으로 ‘백제’라고 선포하였다. 후백제란 이름은 후세에 역사가들이 전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지었던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견훤은 대왕大王을 칭하면서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반포하였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인 후 당나라 연호를 사용했던 것과 달리 자주적인 연호를 쓰게 된 것이다. 정개란 연호에는 ‘바르게 열고, 바르게 시작하고, 바르게 깨우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견훤은 신라보다 일렀던 백제의 역사를 재정립하겠다는 일종의 ‘역사 바로 잡기’와 더불어 의자왕의 숙분을 푸는 것을 당면 과제로 내세웠다. 견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백제에 의한 국토 통일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견훤은 비참하게 몰락한 백제 왕조를 부활하기 위해 힘찬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구원하고 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미륵의 나라 건설을 피력한 견훤은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한 뒤, 내적으로는 호족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그들을 포섭하면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견훤이 백제의 옛 땅을 남김없이 차지했는데 그의 재력의 부유함과 갑병甲兵의 막강함은 족히 신라와 고려보다 뛰어나서 먼저 드러났다”고 적고 있다. 견훤은 그의 해상 세력을 바탕으로 옛 백제의 외교를 복원하는 데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견훤은 그와 더불어 중국의 오월국吳越國과 후당後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신의 존재를 남중국에 알림으로써 그 위상을 높이는 한편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려는 의지를 과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들과의 내분으로 그는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도망을 가서 왕건에게 항복했고, 후백제는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마흔 몇 해에 걸쳐 백제의 맥을 잇겠다고 궁예와 왕건이 이끄는 후고구려와 맞붙어 싸웠던 그의 큰 뜻은 사라지고 그 뒤 대부분의 기록들이나 역사가들은 견훤이 열었던 백제를 후백제라 칭하였다. 그의 뜻을 기리고 전주가 도읍이었던 ‘백제‘라는 나라를 기려서 백제대로라고 명명한 것이다.

백제대로 주변의 환경

꽃밭정이 우측에 전주의 명산인 완산이 있다. 완산을 바라보며 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보이는 산이 다가산이다. 다가산 끝자락에 전주천이 있고, 전주천에서 백제대교는 멀지 않다. 좌측으로 롯데백화점이 있고, 전주대교를 건너면 우측에 전주고속버스터미널이 있고, 좌측에는 전주 공설운동장이 있다.

사거리를 지나면 우측에 전북일보가 있으며, 바로 그 옆에 전북은행이 있다.

전북은행 5거리를 지나면 좌측에 국립대학교인 전북대학교가 있다. 사거리를 지난 좌측에 전북대학교 의과, 치과대학이 있으며, 조달청, 완주군청, 한국전력이 잇닿아 있다. 명주길 네거리를 지나면 우측에 홈플러스가 있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전주역이 있다.

동부대로

기점과 종점
  • 기점색장동160-1(색장동삼거리)
  • 종점용정동127-3(전주IC)
  • 길이총17,485m
유래 및 의의

동부대로는 전주의 동부지역에 위치한 도로로 색장동삼거리에서 출발하여 아중역과 전주역을 거처 전주IC이 이르는 대로이다. 이 도로는 전주IC를 통과하여 진안, 남원, 임실 등을 갈 때와 시내 동부지역에 위치한 아중리와 우아동지역을 가기 위해서 많이 이용한다.

이 도로는 원래 색장동에서 전주역까지는 아중로로 불리웠고, 전주역에서 전주IC까지를 호성로로 불리웠는데, 2009년 새주소도로명을 정비하면서 방향성이 일치한 도로는 하나로 통합한다는 원칙에 의하여 동부대로로 불리게 되었다. 아중역을 지나면 시내쪽으로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어 날로 변화해가고 있으나 남원가는 철길을 넘어서는 마을 풍경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즉 전라선 철길을 따라 동부대로로 일정한 간격을 주면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부대로 주변의 환경
색장동의 막은담이재와 아중저수지 주변

<색장동과 막은담이재>
동부대로가 시작하는 색장동지역은 전주천을 끼고 뒷산을 배경으로 형성되었으며, 마을 중앙에는 당산목이 있어 매년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를 한다. 마을 동쪽에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며 불우한 사람을 많이 도와준 이거두리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색장동에서 마을 뒷산을 통과하여 지나가면 왼쪽에는 기린봉이 나타나고 바로 밑에는 사계절 풍광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아중저수지가 있다. 아중리는 주로 아중역과 아중저수지 밑에 형성된 도시지역을 지칭하고 있어 부르게 되었다. 아중저수지에서 물길을 따라 묵방산쪽으로 올라가면 왜망실이 나오는데, 왜망실은 왜군들이 망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왜군의 막사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왜망실 앞산에는 조선중기 유명한 진묵선사가 머물렀다는 일출암이란 암자가 있다. 진묵선사는 김제에 살고 있는 어머니와 누님을 모셔와 마을 밑에 두고 자주 문안 인사를 드렸으며, 여름에 걱정거리인 모기를 퇴치하기 위하여 도술을 부렸다는 일화가 초의선사가 편찬한 진묵조사유적고에 잘 기록되어 있다. 즉 진묵선사는 고승이지만 어머니를 위한 효도 만큼은 일반인 어느 누구보다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아중역 뒤편 즉 극락암 가는 길에 행치리가 있는데, 이곳은 꿩들이 많아 불러졌던 마을이다. 행치리 마을 뒷산은 산이 약간 높아 주로 꿩들이 이곳에 주로 많이 서식하였던 것이다. 행치리를 지나면 극람암 오르는 길이 나오는데오 마을에서 동쪽으로 가면 금상동을 넘어가는 수리재(소리개재)가 나온다. 즉 수리재를 넘어 회안대군 묘소가 있는 마을을 통과하면 소양, 진안 쪽으로 연결된다.

<인후동과 안덕원>
인후동 안골사거리에는 전주유씨 시조인 유습의 아내인 삼한국대부인 전주최씨 묘소가 있다. 이 비는 전주 인후동 안골사거리에서 안골 현대아파트 뒤편에 위치하며, 지형으로는 유일여고 뒷산에 있다. 방형대석(方形臺石)에 옥개형(屋蓋形) 개석을 갖추고 있으며 1923년에 건립되었다. 원래 17대손 진수공 엄이 건립하고 비문은 16대손 참판공 정양이 지은 구비가 있었다. 그러나 후에 묘도비를 세우면서 유필영이 짓고, 유경양이 두전과 음기를 써서 새겼다. 삼한국대부인 재사(齋舍)인 시사재(時思齋)가 전주시 덕진구 인후1동 산4∼6 내곡에 있다. 또 한 전주유씨 종중에서 설립한 학교법인 시사학원(時思學院) 유일여자고등학교가 묘소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삼한국대부인을 모시는 시사재에는 유재의 해서 편액이 있다. 문헌에 보면 자녀가 귀하게 되면 어머니가 여성 최고의 작위에 추봉된다고 기록되었다. 최씨 부인은 오자일서(五子一婿)가 과거에 급제하여 삼한국대부인의 작위에 추봉되었다고 한다. 완산지 총묘(塚墓) 부분을 보면 가장 먼저 건지산의 사공공묘(司空公墓)에 대한 기술이 있고 다음으로 삼한국대부인최씨묘가 나온다. 기록을 보면 “삼한국대부인 전주최씨는 전주유씨 비조인 증 장령 유습의 아내이며, 묘소는 전주부의 동쪽 성 밖 표석리에 있다(三韓國大夫人崔氏 全州柳氏鼻祖贈掌令 柳濕妻也 墓 在府東城外標石里)”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표석이라는 것은 삼한국대부인묘소가 있는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벌목과 투장을 금지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한국대부인 묘소 주변에는 사적인 묘소가 없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인후공원 동쪽을 안덕원이라 하는데 이 역원자래 부근에는 송씨정려각이 고색창연하게 있으며, 이 길은 전주부성에서 진안으로 가는 역터에 해당되는 곳이다. 안덕원은 1597년 정유재란시 당시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지역의 경계인 웅치에서 전투가 벌어져 전주 안덕원까지 항전이 이루어졌던 장소이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주로 전주지역 선비들의 우리 전주를 지키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생명줄이 없어 진다는 일념으로 결사항전한 지역이다. 이순신이 말한 약무호남(若無湖南)이면 시무국가(是無國家)라는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전주역 부근과 장재동

전주역은 원래 가장 먼저 협괘열차가 다닐 때는 태평동 옛 전매청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이후 지금의 전주시청으로 옮겨졌고, 또 다시 우아동지역으로 이전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주역은 전주의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 앞쪽에는 각종 편의시설과 아파트촌이 형성되었다. 바로 전주역전 뒤편은 장재마을로 불러졌는데 이곳은 전주의 특산품인 합죽선과 종이우산을 많이 만들었으나. 점점 새로운 환경으로 나중에는 비니루우산 등으도 교체하여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아려한 추억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천마산 주변과 호성동 지역

천마산은 건지산과 연결된 지맥으로 동쪽에는 소양천이 흐르고 있다. 소양천은 조선시대에 작은 평저선들이 들어와 왕래를 하였고, 배를 메어두었다는 배메실이 있고 포구가 있었다는 초포마을 등이 있어 있다. 초당마을에는 지행당이라는 문화재가 있으며, 동신아파트와 더블파크아파트가 있는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차량등록사업소가 있는 지역이다. 호성동의 동명은 이 지역의 한사월(한촌)에 사패지를 받았던 호성군 이주를 기리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성군(湖城君) 이주(李柱 : 1562 ~ 1594)는 조선왕조의 7대 임금인 세조의 현손(玄孫)이고 세조의 셋째 아들인 덕원군(德源君) 서(曙)의 증손이다. 전주에 살던 그가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주와 임실 지역에서 의병을 소집하여,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선조가 피난하고 있던 의주까지 올라가서 선조를 알현하였다. 그리고는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여 성을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며, 선조가 의주로 부터 한성으로 환도(還都)할 때에는 시종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그는 호성군에 봉하여졌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훈적(勳籍)에 기록되었다. 이주가 살았던 곳은 오늘의 행정구역으로는 전주시 덕진구 호성동 한사월 마을이었는데, 이곳에는 지금도 호성군의 5대손인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복화(福和)의 효성을 기리는 영모당(永慕堂)이라는 당호(堂號)를 가진 정려(旌閭)가 전해오고 있다. 사실 호성동(湖城洞)의 동명(洞名)이 호성군(湖城君)의 위호(位號)에 기인하고 있을 만큼, 호성군은 그의 짧은 생애에도 우리들의 추앙을 받기에 충분한, 민족을 위한 헌신적 삶을 살았다. 호성동 주변에는 호암석불이 있으며 지금도 논 가운데나 야산에는 집채만하 고인돌이 분포되 있으며, 돌을 자른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다.

송천동 주변

송천동은 건지산 자락의 서남쪽과 가리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건지산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21대 할아버지로 신라시대 사공(司空)이란 벼슬을 지냈던 이한공을 모시는 조경단이 위치하고 있다. 이 단은 광무 3년(1899) 지관의 도움을 받아 지금 있는 자리에 단(壇)을 쌓고 옆에는 고종황제가 직접 쓴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쓴 전서글씨와 석촌 윤용가 쓴 음기가 전한다. 조경단 뒤쪽으로는 소리문화의전당과 전주동물원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문화예술을 향유하기 위하여 찾는 지역이다. 송천동은 원래 오송리와 시천리가 합쳐진 마을 이름이기 때문에 예전에는 소나무와 맑은 냇물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원형이 많이 변하였고 동부대로를 따라 송천동농수산물센터와 메가월드가 있어 많은 사람들의 유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산동과 전주IC 주변

동산촌(東山村, 쪽구름, 쪼꾸래미, 편월 片月)은 동산리의 중심 마을로 쪼꾸래미 또는 편월이라고도 하였다. 동산촌은 일제시대 일본인 동산(히가시야마)이 이 일대에 농장을 만들면서 붙여진 이름이고, 쪽구름이란 명칭은 지형이 월편운(月片雲)혈이 있었기에 부르게 되었다. 또 부근에 장이 서자 조그마한 꾸러미로 사다 팔았기에 쪼꾸래미라는 이름도 붙여졌다고도 한다. 동산동에는 마을 서쪽에 열녀 이종상처전주최씨정려비와 정려각이 있는데, 정려각의 건축물은 아름답다. 정려각 들어가는 제일주유소 옆에 호남제일문이 있는데 전주의 상징인 한옥의 형태로 만들었으며, 글씨는 이 고장의 명필인 강암 송성용이 약간의 행기를 넣어 썼다. 용정동에 있는 전주IC는 전주의 관문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효봉 여태명이 민체로 쓴 편액이 있다.